《 새 시대 도래와 계룡산에 대한 비결 》 ◉○ 계룡산 압정사(壓鄭寺)의 유래 구한말 고종의 즉위와 대를 같이하여 정감록의 비결이 연천봉(連天峰)의 참문(讖文)과 더불어 다시 국망(國亡)의 여론으로 민심히 흉흉하였다. 이때 집정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 뜬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팔도에 나돌고 있는 정감록(鄭鑑錄)책자를 수거하여 공개하에 태우고, 계룡산 입산 금지령을 내렸다. 계룡산은 풍수적인 유형으로 보아도 도읍터로서 대길지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산을 멀리서 보면 임금 제(帝) 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황제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를 낸 가야산 아래 남연군묘도 임금 제(帝)자의 형을 띄고 있다. 상제봉(上帝峰)이 복판에 솟아 있는데 이건이 주산이고 금계산(金鷄山)이 좌청룡 일룡산(一龍山)이..
▣ 국정교과서!! 일제의『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그대로 반영하다. https://youtu.be/uABieX-p_xM☜ 이른바『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은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가 만든 것이다. 일본은 환국·배달·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 역사도 축소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BCE 57년, 고구려는 BCE 37년, 백제는 BCE 18년에 건국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삼국사기』의 상대上代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초기 왕들의 존재도 부정하였다. 삼국의 초기 왕을 모두 누락시키고 고구려는 6세 태조왕, 백제는 8세 고이왕, 신라는 17세 내물왕부터 그 이름을 거론하였다. 일본은 왜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 시대 초기 역사를 부정하..
▣『환단고기』위서론 쟁점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 문제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 중에“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환단고기위서론쟁점④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
매국식민사학자의 주장과 그에 대한 명쾌한 반박기사 우리 역사 바르게 알고 원시반본의 도로 상생의 문화를 열어 갑니다. 2016년 하반기 매국식민사학의 시민강좌1, 김영하 교수, 반도식민사관으로 일관...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5☜ 시민강좌2, 임기환교수, 고대판 조선총독부, 임나일본부설 사실상 인정...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8☜ 시민강좌3, 박현숙교수, 중화사대주의사관에 천착...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4☜ 시민강좌4,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울려퍼진 중국동북공정... htt..
거인의 뼈로 지은 조계사의 대웅전 ~일제 시절 600만 신도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보천교☜. 일제의마수에 결국 맥이 단절되는 아픔을 격으며 정읍 보천교의 본소 십일전은 갈갈이 해체되어 청와대의 기와, 조계사 대웅전, 전주역사로 운명을 달리하는데, 그 역사적 사건의 증거 사료가 조계종의 내부 서신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보천교 건물이었던 것을 이전에 사두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금전이무로 특별하신 용단을 내려주시길 바란다.” (1937년 3월19일) 월정사 주지인 이종욱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2195☜ 2016.10.19 조계사 대웅전 건립 과정 담긴 편지글 확인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