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眞書]-신지 문자 신지 혁덕이 만든 녹도문 鹿圖文으로 추정된다. 전병훈은 『정신철학통편』에서 “동방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기를 ‘단군의 천부경 팔십일자는 신지神志의 전문篆文인데 옛 비석에서 발견되었다.그 글자를 해석해 보고 지금의 묘향산으로 추정되는 백산白山에 각을 해두었다.’고 최치원은 말하였다.”라고 했다.(전병훈,『정신철학통편』). 최치원이 새겨 놓은 이 신지 글자에 대해서 1911년에 나온 김규진의 『서법진결』에서는 창힐 전자라는 이름으로 11자가 소개되고 있다.또 1914년 김교헌의 『신단실기』에는 원문은 소개되지 않고 언문도 아니고[非諺],범자도 아니고[非梵],전자라고도 할수 없는[非篆]신지 글자가 있었는데 ‘법수교 고비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리고 1926년도에 서예가인..
환단고기 북 콘서트 광주 편 예고, 이제 환단고기 위서론의 종지부를 찍는다 https://youtu.be/G5YoFZoufDI 본방송 : 2월 16일(금) 오전 10시 / 재방송 : 밤 10시 강단사학자들이 이 땅에 퍼뜨린 환단고기 위서론 바이러스! 내용의 일부 첨삭과 표현을 문제 삼아 환단고기 전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위서론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며 억지 주장임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이제 환단고기 위서론의 종지부를 찍는다 한국인의 역사 현주소 상고사의 조상들을 송두리째 전면 부정한다! 환국배달조선을 신화로 알고 있다 진정한 통일 역사시대를 열기 위한 대전제 우리 모두가 이루어야 하는 이 시대의 역사 소명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부정되는! 파괴된! 역사,문화 원형정신을 복원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지고한..
▣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3)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 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 ’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
▣환단고기 위서론 쟁점④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의혹에 대한 반론.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17세손 국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
▣ 환단고기 위서론자 쟁점- 영고탑진실② ◉영고탑 기록이 청나라때 나오므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의 진실 환단고기 위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이도학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 주장한다. 즉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대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
▣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쟁점① 위서론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문제는 사서 조작의 문제, 지명과 인명 문제, 근대 술어 사용 문제, 다른 사서와의 관련 문제, 저자 문제 등으로 정리된다. 위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환단고기』를 활발하게 연구하는 의식 있는 학자들의 의견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〇사서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서론자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환단고기』는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편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
▣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위서론의 허구와 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 중에“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위서론의 주장1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
▣『환단고기』의 진정한 면모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그들 비판의 상당 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 라고 하면서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그 숱한 인명, 지명, 연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세기적인 대천재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일축하였다. 천안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환단고기』가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아직 책 자체가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환단고기』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가 ..
▣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2 ㅡㅡ 우리 상고사가 고스란히 실린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범례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 1943)와 오동진(1889~1944)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