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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시대 도래와 계룡산에 대한 비결 》
◉○ 계룡산 압정사(壓鄭寺)의 유래
구한말 고종의 즉위와 대를 같이하여 정감록의 비결이 연천봉(連天峰)의 참문(讖文)과 더불어 다시 국망(國亡)의 여론으로 민심히 흉흉하였다.
이때 집정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 뜬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팔도에 나돌고 있는 정감록(鄭鑑錄)책자를 수거하여 공개하에 태우고, 계룡산 입산 금지령을 내렸다.
계룡산은 풍수적인 유형으로 보아도 도읍터로서 대길지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산을 멀리서 보면 임금 제(帝) 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황제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를 낸 가야산 아래 남연군묘도 임금 제(帝)자의 형을 띄고 있다.
상제봉(上帝峰)이 복판에 솟아 있는데 이건이 주산이고 금계산(金鷄山)이 좌청룡 일룡산(一龍山)이 우백호다.
계룡산의 유래는 봉황을 의미하는 계(鷄)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용을 의미하는 비용승천형(飛龍昇天形)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계룡산은 멀리서 보면 닭벼슬처럼 생겼다. 계룡이 상제봉과 나란히 있으므로 통일 한국의 지도자(군왕)가 제위에 오름을 지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금계(金鷄)와 일용(一龍)이 웅크리고 있는 신도안의 좌우에는 하나씩의 조그마한 원구(園丘)가 있다.
그 동쪽에 있는 것이 금계포란형 난구(卵丘)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일용농주형(一龍弄珠形)의 주구(珠丘)이다.
풍수적으로 보아 이보다 더 좋은 길지는 없다는 것이다. 풍수설을 굳게 믿은 백성들은 새 도읍터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도에 조사한 년도별 통계에 의하면 일청전쟁이 일어나던 해부터 신도안으로의 이주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여 1918년에는 약 1천호 5천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난세일수록 이주가 급증하는 현상을 보였다.
고종이 실권을 물려 받은 후에도 태조가 이곳에다 모신 계룡신사(鷄龍神祠)를 폐하고 천자오악봉선(天子五嶽封禪)의 옛 도리를 따라 이씨 왕조 5백년을 끌고, 새로운 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뜻에서 계룡산 신원사(新院寺)를 신원사(新元寺)로 개명을 하였다.
명성황후는 몰래 승도들에게 돈을 주어 계룡산 연천봉(連天峰) 등운암(騰雲庵) 자리에 압정사(壓鄭寺:정씨 기운을 누른다는 뜻)를 개축하고 정씨 기운의 왕기를 누르는 원사를 세워 밤낮으로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다.
명성황후는 자기 대신 상궁을 보내서 연천봉의 영천(靈泉)에 목욕재계하고 귀한 자손이 태어나기를 기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영험으로 순종이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매년 30석의 공양미를 이절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
등운암(騰雲庵)은 연천봉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등운대사가 창건한 암자인데 후에 이태조가 중간하였다고 한다.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한다는 설에 왕기를 누른다는 뜻으로 이태조가 중건을 하고 압정사라 불렀다. 현재는 등운암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 과연 정감록 예언대로 정씨 왕조가 열릴 것인가.
구한말 이인(異人) 강증산(姜甑山)의 천지공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계룡산 정씨(鄭氏) 왕국 기운을 거두심
* 성도들이 계룡산(鷄龍山) 정씨 왕국에 대해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일본 사람이 모든 섬과 산을 샅샅이 뒤지고 물밑까지 더듬어 보았나니 정씨가 몸 붙여 일 벌일 곳이 어디 있으리오. 그런 생각은 다 버릴지어다.”••••(道典 4편 70장)
○ 정씨 운수를 거둠
* 예로부터 계룡산(鷄龍山) 정씨(鄭氏) 왕국과 가야산(伽耶山)의 조씨(趙氏) 왕국과 칠산(七山)의 범씨(范氏) 왕국을 일러 오나 이 뒤로는 모든 말이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정씨를 찾아 운수를 구하려 하지 말지어다.(道典 3편 184장)
* 정(鄭)씨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정씨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조선 사람은 정씨만 찾나니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정씨만 찾아서 무엇하리오. 한낱 분잡케만 될 뿐이라.그러므로 정(鄭)씨와 조(趙)씨와 범(范)씨를 다 없이하였노라.(道典 5편 76장)
* 우리 국운(國運)을 위하여 정(鄭)씨를 없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정씨의 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혹 이(李)씨가 정씨의 화(禍)를 받을 염려가 있겠으므로
이제 그 살(煞)을 풀기 위하여 이씨 기운을 돋우고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道典5편 239장)
⇒ 위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앞으로 정씨 중에서 임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대통령제도가 수립된 대한민국에서 정씨로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것도 의미를 되새겨 볼만하다.
더군다나 정감록에서 거론되던 정씨,조씨,범씨 역시 대통령이 된 인물이 없으니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다.
더불어 향후 정씨와 이씨가 붙으면 이씨가 이긴다는 의미인데 계룡산이 새 역사를 열 청운의 지세를 가지고 있지만 정감록의 묵은 비결인 정씨 기운을 거두려면 이씨기운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집권은 향후에 계룡의 운수가 발복할 때 정씨기운을 꺽기위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박근혜정권 이후 전개되는 새로운 인물은 어찌 보면 지난날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며 위압적인 묵은 악습을 뿌리 뽑고 백성과 소통하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한국에 수많은 산이 있지만 천황봉이 있는 산은 손을 꼽을 만하다. 백두산 천황봉, 계룡산 천황봉, 지리산 천황봉, 속리산 천황봉, 월출산 천황봉.마이산 천황봉•••• 등이 있고 천왕봉이 있는 산으로는 한라산, 천관산, 무등산, 설악산,등이다.
특히 계룡산에 있는 갑사는 모든 사찰 중의 으뜸이라 하여 갑사(甲寺)란 이름을 쓰며 계룡산에서 출원한 물은 서출동류 (西出東流)로서 대길수(大吉水)로 본다. 그래서 이 물길을 모든 강의 으뜸 강인 갑천(甲川)이라 부른다.
특히 계룡산은 천황봉(天皇峰)과 이를 받쳐주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삼불봉(三佛峰), 관음봉(觀音峰), 쌀개봉, 연천봉(連天峰), 국사봉(國師峰),치국산(治國山)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수려한 일자문성사 (一字文星砂)가 받쳐주는 천하대길지(天下大吉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이산(馬耳山)은 이성계가 조선 건국시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면서 100일씩 기도할 때 마이산 산신령이 기도에 응감하여 금첩을 주면서 천자가 될 것을 점지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왕조가 망해가던 구한말 효령대군파 후손인 이갑룡(李甲龍)처사는 마이산에 새로운 왕조의 발원을 꿈꾸며 마이산 천황봉 아래 탑사를 짓고 천지일월(天地日月)과 음양오행 이치와 팔진도법(八陣道法)에 맞춰 천지탑(天地塔), 일월탑(日月塔), 월궁탑(月宮塔) 등의 석탑을 쌓으면서 유불선 삼도를 습합(習合)한 뒤 미륵님의 이상세계가 건설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 계룡산 압정사(壓鄭寺)의 유래
구한말 고종의 즉위와 대를 같이하여 정감록의 비결이 연천봉(連天峰)의 참문(讖文)과 더불어 다시 국망(國亡)의 여론으로 민심히 흉흉하였다.
이때 집정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 뜬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팔도에 나돌고 있는 정감록(鄭鑑錄)책자를 수거하여 공개하에 태우고, 계룡산 입산 금지령을 내렸다.
계룡산은 풍수적인 유형으로 보아도 도읍터로서 대길지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산을 멀리서 보면 임금 제(帝) 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황제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를 낸 가야산 아래 남연군묘도 임금 제(帝)자의 형을 띄고 있다.
상제봉(上帝峰)이 복판에 솟아 있는데 이건이 주산이고 금계산(金鷄山)이 좌청룡 일룡산(一龍山)이 우백호다.
계룡산의 유래는 봉황을 의미하는 계(鷄)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용을 의미하는 비용승천형(飛龍昇天形)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계룡산은 멀리서 보면 닭벼슬처럼 생겼다. 계룡이 상제봉과 나란히 있으므로 통일 한국의 지도자(군왕)가 제위에 오름을 지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금계(金鷄)와 일용(一龍)이 웅크리고 있는 신도안의 좌우에는 하나씩의 조그마한 원구(園丘)가 있다.
그 동쪽에 있는 것이 금계포란형 난구(卵丘)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일용농주형(一龍弄珠形)의 주구(珠丘)이다.
풍수적으로 보아 이보다 더 좋은 길지는 없다는 것이다. 풍수설을 굳게 믿은 백성들은 새 도읍터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도에 조사한 년도별 통계에 의하면 일청전쟁이 일어나던 해부터 신도안으로의 이주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여 1918년에는 약 1천호 5천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통계에 의하면 난세일수록 이주가 급증하는 현상을 보였다.
고종이 실권을 물려 받은 후에도 태조가 이곳에다 모신 계룡신사(鷄龍神祠)를 폐하고 천자오악봉선(天子五嶽封禪)의 옛 도리를 따라 이씨 왕조 5백년을 끌고, 새로운 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뜻에서 계룡산 신원사(新院寺)를 신원사(新元寺)로 개명을 하였다.
명성황후는 몰래 승도들에게 돈을 주어 계룡산 연천봉(連天峰) 등운암(騰雲庵) 자리에 압정사(壓鄭寺:정씨 기운을 누른다는 뜻)를 개축하고 정씨 기운의 왕기를 누르는 원사를 세워 밤낮으로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다.
명성황후는 자기 대신 상궁을 보내서 연천봉의 영천(靈泉)에 목욕재계하고 귀한 자손이 태어나기를 기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영험으로 순종이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매년 30석의 공양미를 이절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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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운암(騰雲庵)은 연천봉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등운대사가 창건한 암자인데 후에 이태조가 중간하였다고 한다.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한다는 설에 왕기를 누른다는 뜻으로 이태조가 중건을 하고 압정사라 불렀다. 현재는 등운암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 과연 정감록 예언대로 정씨 왕조가 열릴 것인가.
구한말 이인(異人) 강증산(姜甑山)의 천지공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계룡산 정씨(鄭氏) 왕국 기운을 거두심
* 성도들이 계룡산(鷄龍山) 정씨 왕국에 대해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일본 사람이 모든 섬과 산을 샅샅이 뒤지고 물밑까지 더듬어 보았나니 정씨가 몸 붙여 일 벌일 곳이 어디 있으리오. 그런 생각은 다 버릴지어다.”••••(道典 4편 70장)
○ 정씨 운수를 거둠
* 예로부터 계룡산(鷄龍山) 정씨(鄭氏) 왕국과 가야산(伽耶山)의 조씨(趙氏) 왕국과 칠산(七山)의 범씨(范氏) 왕국을 일러 오나 이 뒤로는 모든 말이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정씨를 찾아 운수를 구하려 하지 말지어다.(道典 3편 184장)
* 정(鄭)씨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정씨로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조선 사람은 정씨만 찾나니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정씨만 찾아서 무엇하리오. 한낱 분잡케만 될 뿐이라.그러므로 정(鄭)씨와 조(趙)씨와 범(范)씨를 다 없이하였노라.(道典 5편 76장)
* 우리 국운(國運)을 위하여 정(鄭)씨를 없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정씨의 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혹 이(李)씨가 정씨의 화(禍)를 받을 염려가 있겠으므로
이제 그 살(煞)을 풀기 위하여 이씨 기운을 돋우고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道典5편 239장)
⇒ 위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앞으로 정씨 중에서 임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대통령제도가 수립된 대한민국에서 정씨로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것도 의미를 되새겨 볼만하다.
더군다나 정감록에서 거론되던 정씨,조씨,범씨 역시 대통령이 된 인물이 없으니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다.
더불어 향후 정씨와 이씨가 붙으면 이씨가 이긴다는 의미인데 계룡산이 새 역사를 열 청운의 지세를 가지고 있지만 정감록의 묵은 비결인 정씨 기운을 거두려면 이씨기운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집권은 향후에 계룡의 운수가 발복할 때 정씨기운을 꺽기위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박근혜정권 이후 전개되는 새로운 인물은 어찌 보면 지난날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며 위압적인 묵은 악습을 뿌리 뽑고 백성과 소통하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한국에 수많은 산이 있지만 천황봉이 있는 산은 손을 꼽을 만하다. 백두산 천황봉, 계룡산 천황봉, 지리산 천황봉, 속리산 천황봉, 월출산 천황봉.마이산 천황봉•••• 등이 있고 천왕봉이 있는 산으로는 한라산, 천관산, 무등산, 설악산,등이다.
특히 계룡산에 있는 갑사는 모든 사찰 중의 으뜸이라 하여 갑사(甲寺)란 이름을 쓰며 계룡산에서 출원한 물은 서출동류 (西出東流)로서 대길수(大吉水)로 본다. 그래서 이 물길을 모든 강의 으뜸 강인 갑천(甲川)이라 부른다.
특히 계룡산은 천황봉(天皇峰)과 이를 받쳐주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삼불봉(三佛峰), 관음봉(觀音峰), 쌀개봉, 연천봉(連天峰), 국사봉(國師峰),치국산(治國山)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수려한 일자문성사 (一字文星砂)가 받쳐주는 천하대길지(天下大吉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이산(馬耳山)은 이성계가 조선 건국시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면서 100일씩 기도할 때 마이산 산신령이 기도에 응감하여 금첩을 주면서 천자가 될 것을 점지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왕조가 망해가던 구한말 효령대군파 후손인 이갑룡(李甲龍)처사는 마이산에 새로운 왕조의 발원을 꿈꾸며 마이산 천황봉 아래 탑사를 짓고 천지일월(天地日月)과 음양오행 이치와 팔진도법(八陣道法)에 맞춰 천지탑(天地塔), 일월탑(日月塔), 월궁탑(月宮塔) 등의 석탑을 쌓으면서 유불선 삼도를 습합(習合)한 뒤 미륵님의 이상세계가 건설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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