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인물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 그리고 감시만어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감시만어(感時漫語)』라는 책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감시만어』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성재 이시영(李始榮:1869~1953) 선생의 저서다. 이시영 선생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상해 임시정부가 항주(抗州)를 거쳐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까지 피난했을 때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인 황염배(黃炎培:1878~1965)가 1933년 쓴 『조선』이란 책을 보게 된 것이다. 황염배는 나중 중국공산당 시절 부총리를 역임하는데, 한때 일본에 유학했던 관계로 한국사에 대해 아주 그릇된 관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을 보고 분개한 이시영 선생이 쓴 ..
▣일본에 납치된 성노예(위안부) 할머니의 피맺힌 증언 -정옥선 할머니 증언- [나는 1920년 12월 28일 함경도 북부의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에서 태어났다. ■ 일본군은 나를 붙잡아서 막무가내로 트럭에 실었다. 열세 살 되던 6월 어느날, 나는 밭에서 일하는 부모님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물을 길으러 마을의 우물가로 갔다. 그때 일본군이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일본군은 나를 붙잡아서 막무가내로 트럭에 실었다. 나는 그 길로 경찰서로 끌려가 경찰관 여러 명에게 강간을 당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내 입에다 양말을 틀어넣고 번갈아가며 나를 계속 강간했다. 나는 울었다. 경찰 우두머리가 내 왼쪽 눈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맞았던지, 그날 나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 우리는 5천 명이나..
오늘은 신시개천 5914년, 단기 4350년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원래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 날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8 홍익인간은 단군의 건국이념이 아니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 제2의 개천절 노래 『개천가(開天歌)』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
▣동학東學이 창도唱導된 배경과 최제우의 천명 ◉상제님의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은 최수운 대신사 1)동양문화의 상제님이 천주님이다. 가세가 기운 양반 집에서 태어난 최수운 대신사는 20대에 10년간 조선 팔도을 돌아다니며 민족의 참담한 실상을 목도하면서 탐관오리의 수탈로 가난과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을 제도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처가가 있는 울산에서 구도에 정진하던 어느 날 ,대신사의 충만한 믿음과 지극한 정성, 민중을 사랑하는 뜨거운 정성에 감응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성령의 빛이 비쳐오기 시작 했습니다. 대신사의 나이 32세때인 을묘(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승려가 대신사에게 천서天書를 건네주고 사라진‘을묘천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최수운 대신사는 수 년 동안 구도..
▣ 인류 창세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3)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문화】 6천여 년 전에 벌써 국가 단계의 복잡한 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도 인류의 창세사를 다시 쓸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홍산문화가 세계인을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정교하고 다양한 옥玉 문화이다. 특히 발해연안 지역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옥기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에 ‘옥玉’ 자를 설명한 내용을 보면, ‘신령 령靈 ’자는 밑의 무巫가 옥(가운데 ‘입 구口’ 자 3개)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는 뜻이라 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자인 무인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 바로 옥인 것이다. 중국의 고증학자 왕궈웨이王國維의 해석에 의하면 ‘예禮’ 자는 본디 제기를 뜻하는 ‘두豆’ 자 위에 두 개의 옥[曲]을 올..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2 식민사학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판하는 학자를 죽여야만 자신들이 살수있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해서 한국인의 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고대사 체계를 완성시켜 주었다는 말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영토를 반도내로 축소하고 고조선의 수도는 항상 평양으로 귀결이 된다. 이기백은 고조선이 평안도 일대의 작은 소국이 아니라 만주와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땅이 넓다고 강대국이라는 논리는 낡은 역사관이라며 영토가 광대했던 고조선을 오히려 비판을 한다. 현 동북아역사재단의 매국,이적행위는 그 동안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다. 그 뿌리는 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을 읽고①-이덕일 사마천 사기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자.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사마천 [송미자세가宋薇子世家]》사기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은나라도 동이족 나라이거니와 중화사대주의자들인 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미천 사기에는 고조선은 중국의 은나라에서 봉한 제후국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 은나라의 제후인 기자가 평양에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설은 허구인 것이다.더구나 지금의 북한 평양이 기자조선의 도읍도 아니다.(사실은 기자를 봉한 사실이 없는 것이다.제후국으로 봉하면 신하는 당연한 것인데 신하로 삼지못했다고 앞뒤가 안맞는 기록을 하고 있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 屬幽州(漢書 地..
▣묘청의 난!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사건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난이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중화사대)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국풍사상은 크게 꺾이고 유교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묘청의 난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
▣5.18광주민중항쟁과 택시운전사 폭압적인 5.17군부쿠데타 단행과 대대적 검거 선풍이 몰아치자 대부분이 민주세력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러나 단 한곳에서 예외적 상황이 벌어졌다. 5.18광주 민중항쟁이다. 이 사건은 전남대 정문앞에서 발생했다. 광주일원의 대학은 완전히 공수부대에 장악된 상태였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공수여단이었다. 운명의 18일 멋모르고 대학에 남아 있었거나, 혹은 공부를 하기위해서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걸려들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 터졌다. 비극은 시작되었다. 사태는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비상계엄해제와, 공수부대철수를 강력히 외친것이다.총칼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이들 세력이 존재함은 전두환 일파에게는 위협적인 요소였다.조기에 진압을 하지..
▣일본이 키워준 이병도와 그 후예들, 강단사학을 점령하다. 근대적 역사 서술과 조선사 편찬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우리 고대사를 삭제한 일제는 도처에 식민사관의 독버섯을 심어 놓고 물러갔다. 그 치명적 독버섯 중의 하나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李丙燾이다. 이병도는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후예로 태어났다. 보광학교와 일본인이 운영하던 불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와세다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한 국내 최초의 대학 출신 역사학자이다. 일본 유학은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병도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廣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