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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역사

▣동방 한족사의 시작인 배달국

인천도령 2018. 7. 25. 15:53
▣동방 한족사의 시작인 배달국 

환국의 열두 나라에서 분기해 나간 4대 문명권은 ‘신교의 신앙과 세계관’ 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계 각 지역에 고대 문회를 형성하는 뿌리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 환국의 정통 정신을 계승한 인물은 누구인가? 환국 말경에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이던 환웅桓雄은 원시 문명 생활을 하고 있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갖고 있었다.

 이에 환인께서 중국 감숙성 돈황현敦煌縣에 있는 삼위산三危山과 동방의 태백산太白山을 살펴보고(下視三危太白),태백산(백두산,三神山)으로 가고 싶다는 환웅의 뜻을 허락하여 그를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기」; 『환단고기』 「삼성기」)

이때 환인천제께서는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고 문명 개척단 3천 명을  함께 보내셨다(『삼성기』 하).

그리고 깨천입교開天立敎(새 세계를 열어 가르침을 세움)’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천지광명의 뜻과 대이상을 성취한 인간)’과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을 신교로 다스려 교화함)’를 만세 자손의 홍범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환웅은 이 가르침을 배달국을 여는 개국 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홍익인간·재세이화 사상은 단군왕검께서 세운 고대 조선의 건국 이념이 아니라 환국을 계승한 ‘배달국의 건국 이념’이다.

그런데도 이 이념을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제 뿌리를 거세하여 제 민족 창세 이념의 근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초대 거발한환웅께서 해 뜨는 곳을 따라 동방 백두산으로 오심으로써, 현실 역사[人事]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완성할 동방 문명사의 새로운 흐름, 배달국이 시작[開闢]되었다.


배달국은 BCE 3897년부터 1,565년간 지속되었고 만주, 중국 동부, 한반도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 최근 만주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牛河梁·동산취東山嘴·호두구胡頭溝 등의 유적에서 BCE 3600년경의 돌무지무덤과 여신묘女神願가 발견되고, BCE 3500년경의 대형 석조 건물과 제단, 돌널무덤, 옥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적·유물의 분포와 연대로 보아 이때 만주 지역이 이미 부족 사회를 넘어 계층 분화가 일어나고, 종교 권위자와 정치권력이 형성된 국가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가 단계(중국학자들은 ‘고국古國’이라 함)로 진입한 시기는 BCE 3600년경보다 앞섰음을 알 수 있다. 이 국가는 BCE 3000년부터 BCE 2500년 사이에 촌락 연맹체 사회로 진입한 중국 황하 유역보다도 훨씬 앞서 성립한 것이다(박성수 외,『새로운 한국사』, 56~57쪽;윤내현『한국고대사,50~51쪽).

홍산문화 혹은 발해연안문화로 불리는 이 유적이 바로 배달국의 문명이다. 만주 지역과 더불어 황하 유역에서는 넓이가 한강 이남의 반도半島만한 ‘대문구大汶口문명’이 발견되었다. 중국학자 탕란唐蘭의 발표에 따르면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 조사한 결과 상한 연대가 5.785년 전이라고 밝혀졌는데, 여기서는 문자가 사용되었고, 소호少昊라는 국명國名까지 나왔다고 한다.(소호少昊금천은 태호太昊복희의 광명사상을 계승한 동이족 출신 고대 성왕) (송호수 『한민족의 뿌리사상』,30쪽)

지금까지 황하문명의 전유물처럼 인식해 온 갑골문화는 본래 황하유역이 아니라 발해연안 북부에서 기원하였다(BCE 3500년경). 동북아의 빗살무늬토기와 석묘(적석총, 석관묘, 석곽묘, 지석묘 등) 문화의 기원지起源地도  발해연안이다. 동북아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된 곳 역시 발해연안 북부  이다. 이 지역은 고대에 동이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처럼 환웅의 배달국 건국이 가공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이 고고학적 유물로도 입증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은 마땅히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동방 문명의 당당한 주인공’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형구『한국고대문화의 기원』)

환웅천황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 시에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만주 일대에는 혈거穴居·어렵을 생활양식으로 하는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살고 있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며, 웅족은 어리석고 고집이 세었다.

 환웅천황은 이 두 족속 중 웅족과 협력하여 ‘신의 도시’ 라는 뜻의 신시神市를 수도로 하는 배달국을 세웠다(『신시개천경』). 그리고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배달국을 다스렸다. 이것이 『규원사화』 「태시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신설교以神設敎(신도神道로써 교화를 베푼다)’ 의 핵심 뜻이다.

 신교 신앙의 세계관과 신관의 정수를 요약한 『삼일신고三一神誥』는 환국의 정통 맥을 이은 한민족사의 실질적 시조이신 환웅천황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이분은 태백(백두)산 신시에서 삼신 시장에 따른 원시 행정 조직인 풍백風伯(입법관).우사雨師(행정관).운사雲師(법관)를 두고, 오가五加에게 오사五事를 맡기고 곡식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을 비롯한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짐승 가죽으로 폐백을 삼아 혼인의 예법을 정하셨다. 또한 백성들에게 『천부경』을 풀어 설명하고 『삼일신고』를 강론하며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써 교화를 베푸셨다.( 『삼성기』 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참고)

그런데 민족정신의 바탕을 철저히 깨닫지 못한 승려 일연이 환웅과 웅족의 결합(부족연맹)을, 곰과 호랑이가 자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기도’를 하였다는 신화로 해석될 여지를 준 데다 일제 식민사관인 왜독倭毒으로 말미암아 근본이 부정되거나 엉뚱하게 해석되면서 민족의 뿌리가 말살된 것이다.(1990년 개정판 국사 교과서 이후에는 웅족·호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설명이 부족하고 구체적 역사가 빠져 있어 단군 사화史話를 여전히 신화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웅족과 호족 두 종족은 항상 삼신(상제님)의 계율을 따르는 밝은 백성[桓族]이 되려고 환웅께 교화의 길을 간절히 구하여, 삼칠 (3.7, 21)일간의 수도에 들어간다(『삼성기』하;『삼국유사』 「고조선기」).

이것은 수행 문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이해해야지 신화적 상징으로 보면 안 된다. 이 21일 동안의 구도 기간은 우주 원리로 볼 때 대단히 깊은 뭇을 담고 있다. 구도 기간이 천지 성령의 불기운인 ‘7(칠성)수 ×3(삼신)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상수 철학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3.7일의 수행 끝에 웅족이 마침내 광명의 백성[桓民]으로 교화되었고, 교화되지 않은 호족은 권역 밖으로 쫓겨나서 이때부터 비로소 환족의 부흥이 동방땅에서 시작되었다(『삼성기』하; 『태백일사』 「신시본기」). 한민족사의 기원은 바로 이 환웅천황의 신시 배달인 것이다. 한민족 삶의 이념을 뿌리내린 이 배달 시대는 1,565년간(BCE 3897~2333) 모두 18대의 환웅천황이다스렸다.

동방 문명을 개벽하여 새 시대의 대광명을 열고 신시 배달 시대를 개창하여 다스리신 ‘환웅桓雄’은 큰 스승[桓:크다·밝다, 雄:수컷·스승]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이라 부르는 이유도 환웅천황이 세운 배달국에서 유래한다.『이것이 개벽이다 하』-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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