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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타

▣ 종교는 없다③

인천도령 2017. 6. 21. 10:17
▣ 종교는 없다③

오늘날 기독교가 가장 비판받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배타성 때문이다.

 예수가 전하고자 한 복음,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요원하다.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우리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해 가졌던 배타주의,정복주의,무관심주의를 얼마나 성숙하게 극복하냐에 달려 있다.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성경의 근본 뜻은 외면하고 결국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전쟁을 택해 살인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십자군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할 기회를 상실하는 엄청난 역사적 과오를 남겼다.

십자군 원정실패 이후 카톨릭은 종교적 위기 극복을 위해 이단적신앙에 대해 격렬한 마녀사냥을 한다.

 이로써 수많은 무고한 여성이 죽고 학살당한다. 결국 중세 사회처럼 종교가 부패할 때 새로운 종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론 처음에는 이단과 사이비로 매도되지만 결국 그 시대의 대안 종교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기기독교도 예수는 사회의 이단자요, 그를 따르는 이들도 400년간 사이비 종교인으로 몰려 핍박당했다. 당대에 비윤리적이라고 지탄받던 초기 기독교가 지금 세계적 종교로 성장한 것을 보더라도 일부에서 단죄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신종교를 무조건 이단이라고 매도한다.

일제가 천도교 보천교 대종교 같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매도한 후 민족종교는 아직도 이상한 종교라는 낙인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신종교의 우월성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도하지 말아야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야훼와의 계약을 중심으로 엮어진 신앙의 역사이다. 구약성서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이다 보니 중동지방의 작은 부족적 신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택한 백성’으로 삼고 그와 반대되는 족속은 무자비하게 쳐부수는 신으로 부각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보편의 하나님이다. 수많은 민족과 부족이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을 실재를 체험하고 믿어 왔다.

구약을 살펴보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이지 결코 인류 보편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론이나 신관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만유에 편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선지자와 종교와 지도자를 보내 구원섭리를 펴고 있다. 하나님은 특정교단의 교리로서는 알 수 없는 분이요, 접근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비워야 한다.❞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길이 있듯이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여러 길을 각기 체험한 지역문화를 통해서 제시한 것이다. 정상에서 보면 결국 여러 길은 정상에 오르는 방편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방이 환히 보이듯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다른 종교를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는 독선적 태도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의 진리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성숙한 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없다. 남을 억누르고 자신만이 승자로 군림하겠다는 패권주의적 상극논리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정보화 시대를 맞아 인간을 갈라놓고 구속했던 모든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그동안 높게만 생각됐던 종교의 담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결국 닫힌 종교는 도태된다. ‘진리는 하나다’라는 뜻이 남을 배척하고 제거하고 살아남은 그 종교의 교리만 절대적이란 뜻이 아니지 않는가.

 ‘지구는 하나다’라는 말은 다민족 다 국가를 수용하는 표현이듯이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진리, 상대성을 인정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오늘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가 온갖 갈등과 분쟁과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교회가 예수의 열린 종교로서의 귀한이 되지 않고는 결국 시대의 칼날을 받아 개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종교개혁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회복은 진리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는 유대교나 중세교회와 같이 형식화 됐다는 것이다. 교회의 몸집을 키우는데 혈안이 된 나머지 초대 교회와 같은 진정한 은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 교회, 자기 교파만이 최고라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야한다. 참신앙, 참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 겸허한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항상 깨어 있으라 주께서는 도적과 같이 임하리라”.하셨다. 믿는다고 해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직 깨어진 마음, 열린 마음, 참을 지향할 때만 알아 볼 수 있으리라.

21세기는 종교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디지털문화는 종교간의 벽, 교파이기주의를 타파할 것이다. 종교역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올바른 사람이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예수와 석가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초월과 실재중심의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자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자기 부정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았다. 예수와 석가는 철저히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보였고, 철저히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이 고스란히 나타났던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하나님의 신성)을 회복한 예수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예수가 개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습적이고 상식적인, 그리고 통념적이고 통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자기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실재와 진리를 그대로 본 것이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고 진리와 하나된 상태에서 예수는“내가 곧 진리”라고 선포 했다.석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고백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곧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의 선포처럼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와 하나된 인간을 동양에서는 『태일太一』이라고 한다.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12:34)라고 저주했다. 그리고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마태23:27)라고 질타한다.

예수의 눈에는 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모두 ‘외식하는’이들로 보였다. 근본정신을 외면한 채 외식하는 유대교 신자들을 예수가 책망한 사정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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