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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일본 이와테현(岩手)현 북부 후다이(普代) 마을. 다시마와 미역 양식을 주로 하는 조용한 어촌이 시끌시끌해졌다. 새로 짓기로 한 방조제 높이가 문제였다.


당시 이 마을의 촌장(村長)은 “방조제·수문 높이는 15m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이지 시대(1868년 10월~1912년 7월) 당시 15m짜리 쓰나미가 왔다’고 내려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촌장의 요구는 이내 비판을 받았다.
같은 현 미야코시(宮古) 방조제 높이가 10m였는데, 이 방조제가 당시 ‘만리장성’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보다 5m 이상 높은 방조제를 짓자는 촌장의 요구는 ‘여러 측면에서 무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촌장은 ‘15m 이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방조제는 이와테현이 1967년 5800만엔, 수문은 1984년 35억엔을 각각 투입해 완성됐다.

44년 뒤인 2011년 3월 11일.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가 이 마을을 덮쳤다. 거센 물길은 후다이 마을의 항구를 삼켰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마을을 전멸시키다시피 했던 쓰나미도 높이 15.5m, 전체 길이 155m에 달하는 이 마을 해안가 방조제를 넘지는 못했다.

 후다이 마을 안쪽에 건설된 높이 15.5m, 전체 길이 205m의 후다이 수문도 물길을 따라 들어오는 쓰나미를 막아냈다. 항구에서 일하는 100여명은 당시 대피했지만, 발밑이 젖지도 않았다.

이번 쓰나미로 인해 이와테현의 공식 사망·실종자는 8000명을 넘어섰다. 이웃 미야코시에서도 ‘만리장성’ 방조제가 쓰나미에 무너져 수백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인구 3000명의 이 마을의 피해는 배를 찾으러 간 1명이 실종된 것이 전부였다. 3일 현재 공식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 마을의 후카와타 히로시(70) 촌장은 “조상의 쓰나미 방재에 대한 열의가 주민을 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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