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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의 원불교 (상제님 진리와의 관계는?) 
☯판 밖(場外)에서 개창된 방계(傍系) 교단

판 밖의 장외 세력이란, 판 안에 있는 상제님 성도들을 통해 개인신앙으로 출발했던 인물들이 만든 교단이다. 판 밖에서 벌어진 난법의 뿌리는 대개 보천교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보천교의 뿌리는 태모 고수부님의 선도교이다.

태모님은 종통 전수자로 진법의 씨를 뿌렸지만 차경석 성도의 욕심으로 고수부님을 배반하고 난법해원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사건과 성도들님들과의 직간접적인  인관관계를 맺어 각자 판을 만든 것이 판 밖의 난법판인 것이다.

●“경석이 성경신(誠敬信)이 지극하므로 달리 써 볼까 하였으나 제가 스스로 청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지난 갑오년에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니,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政事)를 못 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시고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춘치자명(春雉自鳴)의 설화(說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경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도전5:205)
 
원불교와 증산 상제님 진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원불교는 창립 때부터 상제님의 진리가 그들 교리의 핵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벽 사상과, 원불교의 심벌 마크인 일원상(一圓相)을 상징한 둥근 원(〇)이다.

이 원을 그들은 불가의 삼신불의 하나인 법신불로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상제님의 무극대도인 무극(無極,〇)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태산이 상제님을 신앙하다 불교로 전향하면서 상제님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무극을 불교 교리화(敎理化)시켜 다시 해석한 것이다. 일찍이 증산 상제님께서는『나의 도가 무극대도니라』고 하셨다.

또 최수운 선생이 경신(I860)년 4월 5일에 상제님으로부터 도통을 받고「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 까보냐」(용담가),「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용담가) 라 한 말과 같이 본래 무극대도는 수운 선생의 도가 아니라 앞으로 강세하실 상제님 대도 정신의 차원성을 말한 것이며, 새로 열리는 상제님 문화권의 우주 시공세계의 창조적 성격을 뜻하는 것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호는 少太山, 1891~1943)은 증산도의 첫 난법교단인 보천교(시대 여건상 판이 성숙 되지 못했다)의 초기 신도였으며, 상제님께서 앞으로의 개벽기에 천상의 병겁 대장으로 임명하신 박공우 성도와는 재종지간(六寸)이었다.

그는 한 때 박공우성도와 함께 원평 근처에서 산 적이 있다. 당시에, 하루는 소태산이 박공우 성도의 집에 들렸다가 상제님의 개벽 말씀을 잔뜩 전해듣고 문밖으로 나가면서 “너무 배가 고프니 우선 물질을 개벽하자”고 소리 질렀다(박공우 성도의 가족들이 지금도 하는 말). 이것이 후에 증산 상제님의 개벽사상에 근거하여「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그 유명한 원불교의 개교표어로 바뀐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사은사상(四恩:천지은, 부모은,동포은,법률은)은 상제님의 보은 진리, 예를 들면『반 술밥의 은혜라도 반드시 갚으라』, 또는 『도통천지보은(道通天地報恩)』과 같은 말씀을 그대로 가져가 문구만 변형시킨 것이다.

이 외에도 그들의 교전에는 증산도 진리의 중심사상인 원시반본, 해원, 상극, 상생, 세계일가 통일공사 등, 상제님의 새 진리 말씀이 그대로 변색되어 들어있다.


그들은 이를 단순히 소태산이나 제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1900~1962)이 강증산을 존경해 인용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이 사상은 우주를 보는 핵심이며 상제님 도(道)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증산도 이념의 노른자위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원불교 개창의 성지이며 소태산의 탄생지이기도 한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는 증산도 교단의 초창기인 보천교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상제님을 신앙하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증산도 교단에는 상제님 진리를 밝히는 책자도 없었고 교리체계도 확실히 서있지 않은 과도기로서 난법시대였다. 따라서 소태산은 상제님의 대도를 체계적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가 당시의 생생한 상제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나름대로 체계화시키고 상제님 도의 핵심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방편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덧붙여 후일에 원불교라는 개신불교 교단을 개창하게 된 것이다.

길룡리가 원불교의 성지가 되고 있는 데에는 중대한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소태산이 자기의 고향인 이곳에서 한동안 증산 상제님의 어머니인 성모(聖母) 권씨를 모시게 된 사연이다. 당시에 상제님의 어머니 권씨는 상제님의 누이동생(선돌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쫓겨오자, 당시의 집안 문제와 어머니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딸을 데리고 길룡리 친척 집에 와서 머물러 계셨던 것이다. 이때는 상제님이 어천하신 지(1909) 10년이 채 못되던 때이다.

증산 상제님의 돈독한 신앙인이었던 소태산은 평소에 원평에 살던 박공우 신도를 비롯한 여러 상제님 신앙인으로부터 강증산 상제님이 곧 미륵불이라는 말을 자주 전해 듣고 어느날 금산사 미륵전에 참배 하러 갔다가, 이곳에서 상제님의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 길룡리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시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솟구쳐 이 때 파죽지세로 대부흥기에 들어선 보천교에 머물면서 길룡리로 달려간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의 어머님을 뵈러 오는 과정에서, 후에 원불교의 2대 교주인 정산(鼎山) 송규(宋奎)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있는 중대한 사실은, 당시 소태산 뿐만 아니라 정산 역시 증산 상제님의 종통을 이어받으신 고수부님을 찾아 헤맨 경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수부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오기 위해 집수리까지 한 사실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불교에서 발행한 자료에도 공개되어 나와 있는 상식적인 내용이다.『관통증산도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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