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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역사

[진서 眞書]-신지 문자

인천도령 2018. 9. 27. 16:38
 [진서 眞書]-신지 문자
 신지 혁덕이 만든 녹도문 鹿圖文으로 추정된다. 전병훈은 『정신철학통편』에서 “동방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기를 ‘단군의 천부경 팔십일자는 신지神志의 전문篆文인데 옛 비석에서 발견되었다.그 글자를 해석해 보고 지금의 묘향산으로 추정되는 백산白山에 각을 해두었다.’고 최치원은 말하였다.”라고 했다.(전병훈,『정신철학통편』).
최치원이 새겨 놓은 이 신지 글자에 대해서 1911년에 나온 김규진의 『서법진결』에서는 창힐 전자라는 이름으로 11자가 소개되고 있다.또 1914년 김교헌의 『신단실기』에는 원문은 소개되지 않고 언문도 아니고[非諺],범자도 아니고[非梵],전자라고도 할수 없는[非篆]신지 글자가 있었는데 ‘법수교 고비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리고  1926년도에 서예가인 백두용이 쓴 『해동역대명가필보』에는 『서법진결』과 같은 모양의 16자가 소개되고 있다. 1943년에 나온 『영변군지』에 소개할 때에 ‘다른 책에 이 16자 전자가 있다’고 했다.
김규진의 1911년에 나온 서법진결에 소개된 신지전자는 11자이다.백두형의 해동명가에는 16자가 소개돼 있다. 이 16자와 11자 사이에는 같은 글자도 있고 다른 글자도 있다. 1940년대까지 신지 전자가 서로 다은 경로의 문헌으로 전수되어 왔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이 신지 전자는 중국의 북송 시대에 서법 書法을 다룬 『순화각첩』에 ‘창힐의 글씨’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창성조적서비>에 실린 전자를 똑같이 옮겨 적은 것이다.<창성조적서비>에는 28수가  새겨져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신지전자는 중복된 글자를 빼면 31글자다.
『환단고기』에서는 현재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에 암각 되어 있는 그림을 신지씨가 만든 글자로 보고 있다.-환단고기 역주본중에서-








-태고 문자의 창시-
환웅천황께서 또 다시 신지神志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書契]를 만들게 하셨다.신지씨神志氏는 대대로 주명主命직책을 관장하여 왕명을 출납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일을 전담하였으나. 다만 말에만 의지할 뿐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할 때 별안간 놀라서 달아나는 암 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맞추려다가 그만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곧 사방을 수색하며 여기저기 산야를 다니다가 모래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곳에 이르러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간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하여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와 같을 뿐이로다.
이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골똘히 생각하며 온갖 사물의 형상을 널리 관찰하였다.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창제하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다만 이 후에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태고 문자가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아마도 그 구조가 쓰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일찍이 남해도 낭하리 郞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등과 그 외 지역의 암석에 문자가 조각된 것이 간혹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그 문자는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전서篆書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성하지 못한 것이 너무 한스럽다.-환단고기 역주본 신비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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