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역사
코미타투스—공동체를 위한 불굴의 전사
인천도령
2018. 2. 13. 21:36
기마인과 불임
역사 기록이 거의없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도 내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유목민들은 자연적으로 내시가 될가능성이 특히 높았다. 고대 유목민들은 지금처럼 발달된 등자나 딱딱한 안장 없이 말을 탔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레예프카 유적에서 별도의 마구 없이 재갈만 발견되었는데, 이는베어벡 라이딩, 즉 안장 없이 말을 탄 증거다.
물론 유목생활을한다고 반드시 성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의 거친 환경에서 마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평생말을 타다 보면 크고 작은 사고로 생식기능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말타기를 기피했을 것이고, 이는 유목 집단의 존망에 치명적인 문제였다.따라서 유목 사회에서는 생식기능의 저하를 겁내지 않도록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부여했다.
고고학이 전하는 초원 민족의 내시 그리고에나리스
헤로도토스의『역사』에는스키타이의 내시 문화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역사』1권 105절에 기록된 에나리스(Enarees)라는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에나리스란 고대 이란어로 ‘남자답지못한 자’란 뜻인데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신전을 약탈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아 성불구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히포크라테스 역시 「공기, 물, 장소에대하여」에서 “말을 자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종양이나 류머티스, 통풍등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성적인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쓴 다음 “스키타이의상위 계급에는 내시가 많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20세기 초반에 티베트를 조사한 러시아의 민족학자 표트르 코즐로프는 티베트 고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출산율이 낮은데, 그중에서도 생식능력이 특히 떨어지는 사람들이 주로 승려가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과거인들의 질병을 연구하는 고병리학 분야에서도 고위도 지역에 가면 저산소증으로 생식능력이 현저히 감소하는 반면,저위도 지역으로 내려오면 생식능력이 회복된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고지대에 살면서말을 타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생활 습관과 지리 환경 모두 생식능력에 악영향을 미치는 조건에 있었던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알타이 지역의 대표적인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문화의 고고학 자료들을 살펴보자. 파지릭 문화는 해발2500미터 높이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이 지역 귀족 계급 고분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들의 뼈에 기아선(오랫동안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사람의뼈에 남는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혹독한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다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그들은 기마 생활을 했으니 이중의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코크 고원의 넒은 목초지가 필요했던 파지릭 문화인들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못했다.
상황이그러하니 유목 풍습은 출산율 감소 문제로 금방 소멸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혹독한초원에 국가를 세웠고, 유라시아 전체를 정복한 몽골제국을 수립하기까지 천년 이상 초원 제국의 명맥을이었다. 초원 유목민들에게는 용맹함으로 무장한 전사 계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가 내시라고 폄하했던 에나리스는 사실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던 유목 전사들이었다. 파지릭 문화나 기타 스키타이 시태 유목 문화의 전사 계급 고분을 보면 아내나 자식을 합장한 가족묘의 개념이거의 없다. 오직 전사 한 사람만 매장하는 형태다. 여성의무덤이 있긴 하지만 여기 묻힌 사람은 대부분 여사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지릭문화에서 전사는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지배계급의 일부로 주군을 보호하는 친위 부대로서 기능했다. 중앙아시아역사가 크리스토퍼 벡위드는 『중앙유라시아 세계사(The Empires of Silk Road)』에서 이 친위 부대를 ‘코미타투스’라고 명명했다. 주군은파지릭 전사들의 충성을 화려한 전리품으로 보상했다. 이는 실제 고분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귀중품과 위신재로증명된다. 코미타투스는 끊임없이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또 고원지대에서 줄곧 말을 타고 다녀야했기에 생식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원지대의 코미타투스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전사로 활동하였다. 실제 고분을 발굴한 결과 여성들 역시 사제로 활동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전사로 활약했음이밝혀졌다.
평범한 결혼 생활을 거부하고용맹한 전사로 살기를 택했던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주변 민족에게 커다란 공포였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주변 사람들이 성욕에 구애받지 않는 그들을 고자나 내시로 비하했던 것이 아닐까?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나온 에나리스라는 이름에도 그들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그리스인들의 눈에 비친 에나리스는 인간의기본 욕구인 성욕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전쟁광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에나리스를 ‘신의 저주가 내린 내시 같은 놈’이라고 비하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달랬을 것이다.
집단 보존의 법칙, 초원의 전사들은 어떻게 인구를 유지했나?
생식능력이 부족한 에나리스가지배계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이 집단에는 분명 심각한 인구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원의전사들은 어떻게 인구를 유지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먼저 농경 집단과의 전쟁을 통해 포로를 확보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알타이 지역의 출토인골을 분석한 결과 백인, 황인, 혼혈 등 다양한 인종이섞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 흉노 제국의 이볼가 성터와 몽골의 여러 성지들을 발굴해 보니 이 지역 인구의상당수가 주변에서 유입된 외지인이었음이 드러났다
두번째는 일부다처제 또는일처다부제 등으로 생식력이 좋은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도록 하고, 주변에서 그 아이들을 입양하여 기르게하는 방식이다. 즉 출산과 양육이 분리된 형태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일부 증명되었다. 파지릭 유적의 미라에서 추출한 DNA의분석 결과가 그런 가능성을 방증한다. 알타이 남부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의 DNA와 알타이 파지릭 유적 2호 고분에서 발굴된 미라의 DNA를 분석한 결과 양자의 친족 관계가 확인되었다. 알타이 서쪽에위치한 파지릭 유적은 파지릭 문화 최상위 계급의 무덤이다. 반면 우코크 유적은 알타이 남쪽 중국과의국경 지역에 위치한 유적으로 고분 규모로 보면 최상위와 일반 계급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두 유적은직선거리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친연 관계를 상정하기 어렵다. 또 파지릭 문화는 국가 단계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분봉 형태로 왕이 각지에 신하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 지역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계 혈통이 같은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출산을 담당했던사람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음을 뜻한다. 적어도 최상위 계급은 공통 모계를가지며, 그들의 공통된 어머니는 사제로서 집단 내에서 추앙받았을 것이다.
고원 지대는 주변의 침입이용이하지 않고 겨울에도 안정적인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기 떄문에 초원 유목 민족들에게는 특히 성스러운 장소였다.때문에 여기에는 주로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파지릭 문화가 대표적으로 그러했다고원지대의 거주민들은 주로 제사장 계급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은 농경민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적은 자식들을 키웠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인간에게도 다른 생물들처럼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딱딱한 안장 대신 펠트를 얹은 안장을 썼고, 그나마도 높은 신분이 되어야 좀 더 안정적인 것을 쓸 수 있었다. 일반무사나 하위 계급들은 제대로 안장을 갖추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이 사고를 겁내지 않고 용맹한 전사로거듭나려면 종족 번식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원의 유목민족들, 적어도 스키타이와 파지릭 사람들에게 내시는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기형적인제도가 아니었다. 재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 남성성을 포기한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초원의 전사들은 열악한환경에서 자신의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집단을 방어하기 위해 기본적인 욕망을 버렸다. 초원에서 최초의 세계제국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살아남은 수천 년 유목민들의 지혜가빚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강인욱, 『유라시아 역사 기행』, 민음사 (2015),pp. 62 ~ 69
역사 기록이 거의없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도 내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유목민들은 자연적으로 내시가 될가능성이 특히 높았다. 고대 유목민들은 지금처럼 발달된 등자나 딱딱한 안장 없이 말을 탔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레예프카 유적에서 별도의 마구 없이 재갈만 발견되었는데, 이는베어벡 라이딩, 즉 안장 없이 말을 탄 증거다.
물론 유목생활을한다고 반드시 성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의 거친 환경에서 마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평생말을 타다 보면 크고 작은 사고로 생식기능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말타기를 기피했을 것이고, 이는 유목 집단의 존망에 치명적인 문제였다.따라서 유목 사회에서는 생식기능의 저하를 겁내지 않도록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부여했다.
고고학이 전하는 초원 민족의 내시 그리고에나리스
헤로도토스의『역사』에는스키타이의 내시 문화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역사』1권 105절에 기록된 에나리스(Enarees)라는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에나리스란 고대 이란어로 ‘남자답지못한 자’란 뜻인데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신전을 약탈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아 성불구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히포크라테스 역시 「공기, 물, 장소에대하여」에서 “말을 자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종양이나 류머티스, 통풍등으로 고생하기 때문에 성적인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쓴 다음 “스키타이의상위 계급에는 내시가 많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20세기 초반에 티베트를 조사한 러시아의 민족학자 표트르 코즐로프는 티베트 고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출산율이 낮은데, 그중에서도 생식능력이 특히 떨어지는 사람들이 주로 승려가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과거인들의 질병을 연구하는 고병리학 분야에서도 고위도 지역에 가면 저산소증으로 생식능력이 현저히 감소하는 반면,저위도 지역으로 내려오면 생식능력이 회복된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고지대에 살면서말을 타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생활 습관과 지리 환경 모두 생식능력에 악영향을 미치는 조건에 있었던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알타이 지역의 대표적인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문화의 고고학 자료들을 살펴보자. 파지릭 문화는 해발2500미터 높이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이 지역 귀족 계급 고분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들의 뼈에 기아선(오랫동안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사람의뼈에 남는 흔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혹독한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다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그들은 기마 생활을 했으니 이중의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코크 고원의 넒은 목초지가 필요했던 파지릭 문화인들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못했다.
상황이그러하니 유목 풍습은 출산율 감소 문제로 금방 소멸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혹독한초원에 국가를 세웠고, 유라시아 전체를 정복한 몽골제국을 수립하기까지 천년 이상 초원 제국의 명맥을이었다. 초원 유목민들에게는 용맹함으로 무장한 전사 계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가 내시라고 폄하했던 에나리스는 사실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던 유목 전사들이었다. 파지릭 문화나 기타 스키타이 시태 유목 문화의 전사 계급 고분을 보면 아내나 자식을 합장한 가족묘의 개념이거의 없다. 오직 전사 한 사람만 매장하는 형태다. 여성의무덤이 있긴 하지만 여기 묻힌 사람은 대부분 여사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지릭문화에서 전사는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지배계급의 일부로 주군을 보호하는 친위 부대로서 기능했다. 중앙아시아역사가 크리스토퍼 벡위드는 『중앙유라시아 세계사(The Empires of Silk Road)』에서 이 친위 부대를 ‘코미타투스’라고 명명했다. 주군은파지릭 전사들의 충성을 화려한 전리품으로 보상했다. 이는 실제 고분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귀중품과 위신재로증명된다. 코미타투스는 끊임없이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또 고원지대에서 줄곧 말을 타고 다녀야했기에 생식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원지대의 코미타투스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전사로 활동하였다. 실제 고분을 발굴한 결과 여성들 역시 사제로 활동한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남자들과 똑같이 전사로 활약했음이밝혀졌다.
평범한 결혼 생활을 거부하고용맹한 전사로 살기를 택했던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주변 민족에게 커다란 공포였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주변 사람들이 성욕에 구애받지 않는 그들을 고자나 내시로 비하했던 것이 아닐까?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나온 에나리스라는 이름에도 그들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그리스인들의 눈에 비친 에나리스는 인간의기본 욕구인 성욕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전쟁광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에나리스를 ‘신의 저주가 내린 내시 같은 놈’이라고 비하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달랬을 것이다.
집단 보존의 법칙, 초원의 전사들은 어떻게 인구를 유지했나?
생식능력이 부족한 에나리스가지배계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이 집단에는 분명 심각한 인구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원의전사들은 어떻게 인구를 유지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먼저 농경 집단과의 전쟁을 통해 포로를 확보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알타이 지역의 출토인골을 분석한 결과 백인, 황인, 혼혈 등 다양한 인종이섞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 흉노 제국의 이볼가 성터와 몽골의 여러 성지들을 발굴해 보니 이 지역 인구의상당수가 주변에서 유입된 외지인이었음이 드러났다
두번째는 일부다처제 또는일처다부제 등으로 생식력이 좋은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도록 하고, 주변에서 그 아이들을 입양하여 기르게하는 방식이다. 즉 출산과 양육이 분리된 형태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일부 증명되었다. 파지릭 유적의 미라에서 추출한 DNA의분석 결과가 그런 가능성을 방증한다. 알타이 남부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견된 여성 미라의 DNA와 알타이 파지릭 유적 2호 고분에서 발굴된 미라의 DNA를 분석한 결과 양자의 친족 관계가 확인되었다. 알타이 서쪽에위치한 파지릭 유적은 파지릭 문화 최상위 계급의 무덤이다. 반면 우코크 유적은 알타이 남쪽 중국과의국경 지역에 위치한 유적으로 고분 규모로 보면 최상위와 일반 계급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두 유적은직선거리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친연 관계를 상정하기 어렵다. 또 파지릭 문화는 국가 단계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분봉 형태로 왕이 각지에 신하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 지역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계 혈통이 같은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출산을 담당했던사람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음을 뜻한다. 적어도 최상위 계급은 공통 모계를가지며, 그들의 공통된 어머니는 사제로서 집단 내에서 추앙받았을 것이다.
고원 지대는 주변의 침입이용이하지 않고 겨울에도 안정적인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기 떄문에 초원 유목 민족들에게는 특히 성스러운 장소였다.때문에 여기에는 주로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파지릭 문화가 대표적으로 그러했다고원지대의 거주민들은 주로 제사장 계급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은 농경민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적은 자식들을 키웠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인간에게도 다른 생물들처럼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딱딱한 안장 대신 펠트를 얹은 안장을 썼고, 그나마도 높은 신분이 되어야 좀 더 안정적인 것을 쓸 수 있었다. 일반무사나 하위 계급들은 제대로 안장을 갖추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들이 사고를 겁내지 않고 용맹한 전사로거듭나려면 종족 번식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원의 유목민족들, 적어도 스키타이와 파지릭 사람들에게 내시는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기형적인제도가 아니었다. 재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 남성성을 포기한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초원의 전사들은 열악한환경에서 자신의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집단을 방어하기 위해 기본적인 욕망을 버렸다. 초원에서 최초의 세계제국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살아남은 수천 년 유목민들의 지혜가빚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강인욱, 『유라시아 역사 기행』, 민음사 (2015),pp. 62 ~ 69